Oriental Note
향수 노트 종류 1: 오리엔탈 향조
오리엔탈 향수의 기원
말 그대로 동양적인 느낌의 향조로 여기서 동양은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를 뜻하기보다 서양인 기준에서 떠올리는 동양의 이미지, 아랍국가나 서아시아, 인도를 뜻한다. 건조한 사막지대, 모래바람, 오아시스, 실크로드 이미지를 떠올리면 가깝지 않나 싶다.
향수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유럽의 역사에는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영향과 약탈 전쟁, 식민지 제국주의와 관련이 높고 영국으로 건너간 차(Tea) 문화와 마찬가지로 16세기경부터 동양의 각종 향료, 향신료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조향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 서양에서는 귀족 계급에서만이 향수를 사용했고 생소한 동양의 향을 첨부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시그니쳐 체취를 풍기는 것이 귀족 사회, 그들만의 리그에서 은은한 과시나 자랑쯤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오리엔탈 향은 무엇인가?
각설하고, 향수의 장르 중 하나인 오리엔탈 노트 향수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내피셜로 몇 가지 정도의 특징을 정리해 보겠다.
1. 아라비안 나이트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관능적이고 강렬하며 깊고 그윽한 향조로 식욕을 돋우는 이국적인 향신료, 달콤하고 풍부한 향이 합쳐져 풍요로움을 상기한다. 실크로드의 호화로움 내지는 금빛 사치스러움과 맞닿아있다. 이렇듯 오리엔탈 노트는 낮보다 밤에 더 잘 어울리는 향이다.
2. 본능적인 영역에서의 호기심
끈적하고 눅진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따스한 웜 베이스와 원초적인 욕망을 투영하는 애니멀릭한 요소, 스파이시 향료의 강렬한 자극이 각기 상반된 매력을 부여한다. 이러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자극적인 요소들이 본능적인 영역에서 감각을 일깨워 섹슈얼 코드로 작용하는 것으로 마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심, 카마수트라에 대한 내밀한 호기심과 같다.
3. 발삼 테라피
발삼, 발사믹한 향이라고 하면 식초를 떠올리기 쉬운데 향수에서는 송진향을 뜻한다. 예로부터 통증이나 상처를 치유하고 정신건강을 이롭게 하는 악용 수지의 효능과 동양의 신비 내지는 환상, 때로는 동경이 합쳐져 발삼향은 테라피적인 요소가 분명 있다. 동네에서 찾아도 되는데 진정한 나를 찾겠다며 인도로 떠나는 심리 같은 것이다.
오리엔탈 노트의 구성, 주요 캐미컬
1. 바닐라(바닐리아, Vanilla)
바닐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따뜻하고 보드라우며 달콤한 향으로 향수에서 바닐라가 향료로 쓰이는 건 열매 부분인 '바닐라 빈'이다. 바닐라 빈을 꼬투리째 발효시켜 향료로 만든다.
바닐라 빈의 끈적하고 까만 알갱이들이 알알이 박힌 줄기를 긁어내 주로 제과, 제빵에서 우유와 계란, 밀가루의 비린내를 제거하고 풍미를 올리는 용도로 쓰이는데 리얼 바닐라 빈은 상당히 고가이기 때문에 케이크와 같은 고급 디저트에 주로 쓰이고 식품 제조 회사에서는 대부분 합성향료를 쓴다.
바닐라는 합성 착향제가 상당히 퀄리티가 좋기도 해 흔히 바나나우유나 바나나킥에 들어가는 바닐라향은 합성향인데 향수에서도 바닐라가 향료로 쓰이는 건 리얼 바닐라 빈도 있고 합성향도 있다.
대부분의 니치 향수에 쓰이는 건 리얼 바닐라 빈 향료이지만 패션 하우스 향수나 저가 브랜드 향수에서는 주로 합성 향료를 쓴다. 달콤하고 여성스러운 플로랄, 플루티 계열의 저가 향수나 코롱 중에 바닐라, 또는 바닐리아라고 표기되는 것은 대부분이 합성 향료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설탕에 잔뜩 절여진 바닐라 합성향료에 워낙 익숙하다 보니 바닐라 향수에도 흡사한 향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바닐라 향료는 상당히 진하고 묵직하면서도 정제된 단일한 향이 나고 마냥 달콤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비터스윗한 씁쓸함도 느껴진다.
바닐라 향료는 오리엔탈 노트뿐만 아니라 구어망드에서도 주로 쓰이는 캐미컬로 이러한 묵직하고 달달한 향 때문에 흔히 호불호가 갈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바닐라 향보다 바닐라랑 주로 컴파운딩 되는 다른 캐미컬, 예를 들어 앰버 향과 복합된 향을 떠올리기 때문에 속이 느글거리고 불호가 나타나기 쉽다.
2. 호박(앰버, Amber), 수지(레진, Resin)
앰버라는 용어의 개념은 쥬라기 공원에서 모기가 들어있던 그 화석, '호박'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앰버 향은 향수 업계에서 나무 송진이 몇십, 몇백, 몇천 년 묵어 단단히 굳은 퇴적물인 호박(보석)에서 날 법한 향을 조향사의 상상으로 구연해 낸 향조를 뜻한다.
앰버 노트가 올팩토리 장르로 굳혀진 것은 19세기 들어 정립된 개념으로 나무 송진인 벤조인과 같은 발삼, 스티락스(때죽나무)의 수지, 시스투스의 수지인 럽다넘, 바닐라 향의 유기화합물인 바닐린을 첨가해 이런 몇 가지의 콤비네이션을 블렌딩 한다. 좀 더 쉽게 정리하자면, 굳힌 나무 송진 향과 바닐라 합성향을 섞어 만든 게 앰버 향의 정체다.
비싼 향료들의 복합체이기도 하고 균일한 향, 안정화 등 공정 과정도 까다롭다 보니 앰버 베이스 향수는 주로 합성향료가 쓰인다. 고가의 니치향수 업계에서도 지보단, IFF 같은 세계적인 향료 회사의 안정적이고 획일화된 앰버향을 블렌딩 하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앰버 베이스를 생산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원료가 워낙 비싸니 원가 절감의 사정과 다양한 향, 볼륨감을 위해 컴파운딩하는 것이 바로 통카빈이다. 통카빈은 바닐라 향과 흡사하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기 때문인데 바닐라 향조, 앰버 향조에 흔히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앰버는 크게 웜, 센슈얼(관능), 파우더리, 스위트로 표현되는데 우디하고 발사믹한 수지류가 묵직하고 파우더리한 텍스쳐로 발향되고 애니멀릭하고 레더리한 럽다넘이 관능을 담당하며 바닐라의 들큰하고 따스운 향의 복합체라고 보면 된다.
3. 미르(몰약, Myrrh), 프랑킨센스(유향, 올리바넘, Frankincense)
미르와 프랑킨센스는 서구권에서 유구하게 아시아에서 온 자연친화적 치료제, 신비의 묘약쯤으로 여겨지는 대표적인 캐미컬로 아로마테라피를 상징하기도 한다. 불리는 명칭은 미르는 몰약, 프랑킨센스는 유향, 올리바넘(Olibanum) 정도로 표기된다.
미르는 감람과 몰약나무에서, 프랑킨센스는 유향나무에서 추출한 수지 성분인데 제각기 쓰이기도 하지만 효능에서도 향에서도 상호보완적이고 시너지가 있어 세트마냥 미르와 프랑킨센스는 동시에 쓰이는 경우가 많다.
미르 향은 부드럽지만 스모키하게 퍼지는 우디 발삼향과 사향(머스크)의 파우더리한 가루 느낌의 조화로 달콤하고 따뜻하게 발향된다. 프랑킨센스 향은 좀 더 스파이시한 향취로 과일향이 나는 듯한 신선한 발사믹, 약간의 그린함, 연필에서 나는 듯한 산뜻한 우디향이다. 마치 미르가 샌달우드라면 프랑킨센스는 시더우드의 결이다.
4. 넛맥(육두구, Nutmeg)
'사향 냄새가 나는 호두'라는 의미가 있는 향신료로 특유의 매콤하면서도 달달하고 고소하며 따뜻한 향이 난다. 디테일하게 설명해 보자면, 향이 많이 날아간 계피와 생강, 후추, 아몬드 가루 등을 섞은 듯한 복합적인 향으로 넛맥은 콜라에도 첨가되는 향신료인데 이 사실을 알고 향을 맡으면 정말 콜라에서 느껴지는 단내가 나는 것만 같다.
넛맥, 육두구 자체는 주로 육류의 잡내 잡기 용도, 소스의 풍기 올리는 용도, 베이킹에서 계란과 밀가루 비린내를 잡는 용도로 서구권에서는 가정에서 우리가 카레가루나 후추를 사용하듯이 흔히 쓰이는 향신료다.
오리엔탈 향조에서 바닐라, 앰버, 클로브 등과 함께 쓰이는 대표적인 캐미컬로 넛맥의 스파이시한 향을 첨가하여 오리엔탈 노트에서 주원료의 향취를 끌어올리는 보조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넛맥은 오리엔탈 노트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매우 폭넓게 쓰이는 흔한 향료이고 특히 웜한 발향이 주가 되는 향수에 쓰인다. 이렇듯 넛맥은 여러 노트와 장르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요즘 트렌드는 넛맥 특유의 약간의 흙내와 가벼운 나무향, 살짝 쿰쿰한 냄새 때문에 곰팡내스러운 느낌을 낼 때, 낡고 더스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도 사용된다.
5, 클로브(정향, Clove)
클로브 역시도 오리엔탈 노트뿐만 아니라 넛맥처럼 정말 다양하게 쓰이는 스파이시 캐미컬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흔히 병원 냄새, 약 냄새, 은단 냄새로 인식되고 금속성 향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오리엔탈 향수의 가장 큰 불호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클로브 향인데 까스활명수나 박카스, 레드불 같은 카페인 음료에서는 나는 향과 동일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값비싼 향료의 집합인 오리엔탈 향조에서 활명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면 불호인 것은 당연할 것이다. 수십만 원을 태워 활명수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느낌이 들 수 있기 때문.
6. 대추야자(데이츠, Dates)
향료, 향수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중동에서 인기가 급성장한 향료이자 오리엔탈 노트의 한 장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대추야자다. 무슨 오아시스, 샌드, 데저트, 두바이, 에메랄드, 아부다비, 아라비안 등의 이름이 붙어 나온 최신 버전의 오리엔탈 계열 니치 향수에 거의 들어간다.
건조한 사막에 특화된 대추야자는 생명력이 강해 나뭇가지가 꺾일 정도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길에 널려있을 정도로 정말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중동사람들의 국민간식이자 특산물인데 향수, 향료업계에서는 중동, 곧 동양을 상징하는 향으로 인식된다.
패션감각을 뽐내기 어려운 환경과 조건 때문인지 몰라도 유독 향수 시장이 큰 아랍을 겨냥한 트렌드 반영일지 모르나 데이츠가 들큰하고 그윽하며 웜한 향을 선호하는 중동인의 니즈에 완벽히 부합하는 캐미컬인 것만은 확실하다.
대추야자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말린 대추랑 결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당도가 엄청 높아 설탕에 조린 듯 훨씬 더 들쩍지근하고 진득하며 갓 구운 쿠키에서 풍기는 눅진하고 달달한 향이 특징이다. 굳이 흡사한 느낌을 찾자면 대추정이나 시나몬애플잼의 들큰한 느낌이다.
7. 그 외
머스크, 용연향과 같은 애니멀릭한 향료, 진저(생강), 시나몬(계피), 페퍼(후추), 카다멈(카르다몸), 코리엔더(고수) 등의 스파이시한 향료가 쓰인다.
오리엔탈 노트의 변주
오리엔탈 노트 계열로 묶일 수는 있지만 완전한 오리엔탈 향조라고는 할 수 없는 변주 장르를 몇 가지 소개하려 한다.
우디 오리엔탈
웜베이스의 우드 향을 기반으로 한 오리엔탈 향조다. 오우드(침향, 아갈우드)나 샌달우드(백단), 과이악 우드와 같은 부드럽고 따뜻하거나 크리미한 우드 향이 주가 된다. 여기서 서늘하고 뾰족한 퍼니들(전나무), 파인(소나무) 같은 침엽수 계열의 코를 찌르는 화한 코니퍼러스한 향이나 차갑고 담백한 우디향을 구현하는 시더우드(삼나무)는 배제되는 특징이 있다.
애니멀릭 오리엔탈
그윽하고 관능적이며 파우더리한 중성적인 향을 기반으로 애니멀릭 향조가 두드러지는 오리엔탈 향조다. 머스크(사향 노루의 분비샘을 말린 페로몬 향료)와 앰버가 주가 된다. 카일리 제너와 같은 헬시하고 관능적인 추구미를 가진 세련된 여성이 연상된다.
플로럴 오리엔탈
재스민, 튜베로즈, 오키드와 같은 왁시하고 크리미한 벨벳 텍스쳐, 꼬릿한 인돌릭함이 느껴지는 플로럴 캐미컬과 오리엔탈 노트를 컴파운딩한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가 떠오르는 관능적인 향조로 위와 같은 향의 볼륨감과 확장성이 큰 플로럴이 주로 쓰이고 동양의 느낌과 먼 장미나 바이올릿, 뮤게 같은 그리너리한 산뜻한 향은 쓰이지 않는 것이 큰 특징이다.
레더 오리엔탈
가죽에서 느껴지는 중성적 혹은 남성적인 무드의 에니멀릭한 향이 중심이 되는 오리엔탈 향조다. 발삼한 인센스로 매캐하고 더스티하게 혹은 볼륨감 있고 강렬하지만 타는 듯 드라이한 우디 블렌딩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나 공통점은 동물성이 유독 강조된다는 점이고 그래서 럽다넘 향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오리엔탈 향수
계절감: 가을, 겨울
낮보단 밤에 어울린다.
오리엔탈 향수는 동아시안의 체취나 이미지에 어울리기 쉽지 않고, 산뜻하고 청량하거나 점잖고 온화한 향에 선호도가 높은 K-퍼퓸 시장에서 불호의 요소가 뚜렷하다.
오리엔탈 향조는 향수 마니아 사이에서도 내가 쓰기는 싫고 남이 쓰면 좋은 향수로 꼽힌다. 스파이시하고 독특한 향이 거슬리거나 발향성이 강하고 크리미한 향이 느끼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특히 앰버 향이 부담을 주는데 두통이나 멀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 향수를 독하지 않은 수준에서 은은한 발향을 내려면 전날 코트 안쪽에 뿌려놓거나 하반신 위주, 무릎에 소량만 쓰면 좋다. 그래도 하루종일 간다.